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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ffic light카테고리 없음 2021. 3. 26. 14:12

어딘가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오래 지났어도 바래지지 않는 기억 속 바닷가처럼. 어머니를 먼저 하늘에 떠나보낸 후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파도소리가 이렇게 선명할 수 있나. 란티엔은 몽롱한 기운 속에서도 미소 지었다. 자신이 바다에 왔을 리 없으니, 이건 어머니가 나오는 꿈이 분명했다. 이젠 당신 꿈을 꾸어도 나는 베개를 적시지 않고 거울을 향해 웃어 보이며 더 이를 악무는 사람이 되었으니 마음껏 꿈에 나와주길 바랐다. 어떻게든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썼지만 꿈이라 그런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근육이 뻐근하고 뼈마디가 결린 느낌이 낯설었다. 왜 이렇게 온몸이 무겁지, 그런 생각에 끙끙대며 겨우 떠진 시야에 보이는 건 고급스러운 천장과 환하게 내려오는 햇빛이었다. 작년에 입사하며 겨우 대출받아 마련한 평범한 오피스텔 천장이 아닌,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양.
그는 급히 상체를 들다 끊어질 듯 한 허리 통증에 미간을 좁혔다. 부드러운 시트의 감각 보다 중요한 건 바로 출근을 해야 하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한 다급 함이었다. 그제야 어제가 반년 동안 이어진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팀 전체 회식을 했던 날이란 게 떠올랐다. 아, 술을 먹어서 그렇구나. 여긴 팀원들이 잡아준 숙소인가? 침대 옆 협탁 위 확인한 휴대폰의 시간은 이곳이 어딘지 몰라도 출근까지는 꽤 남은 시간이었다. 그제야 어깨를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란티엔의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널려진 옷가지 들이었다.
넓은 호텔방 속 현관문부터 침대까지 놓여진 재킷, 셔츠, 벨트, 완전히 구겨진 바지와 그 밑에 있는 속옷. 그 궤적을 눈으로 따라가며 고개를 움직이는 그의 어깨가 다시 굳어갔다. 이건 아무리 그쪽에 문외한인 자신이 보기에도 확실한 사고의 현장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손이 벗은 어깨와 가슴을 가로질러 침대에 간신히 걸쳐있는 이불로 향했다. 그리고 허벅지에 남겨진 처음 보는 자국들. 끊어진 물소리에 벼락처럼 찾아온 정적.
란티엔의 눈이 잔뜩 경계를 담고 물소리가 났던 욕실 쪽으로 고정되었다. 사실 그 속에선 맹렬한 의심과 함께 떨림도 공존하고 있었다. 취업에만 달려들며 애인 같은 건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자신이, 설마 술에 취해 다른 여자를 꼬셔 호텔방을 잡았다고?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고 애초에 술이 강한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취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났는지 가늠도 되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하던 그때 문이 열리고 익숙한 향기가 먼저 코에 스며들었다.
살짝 달달하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너무 가볍지 않은 그 향기. 가운을 입어도 선으로 드러나는 넓은 어깨와 그 아래 벌어진 탄탄한 상체. 순간 멍하니 감상하던 란티엔이 번쩍 눈을 위로 들어올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늘 보던 단정하고 웃는 얼굴이 아닌 물에 젖은 채 어딘가 온도가 낮은 얼굴로 똑같이 자신을 마주하는 남자. 슬로모션이라도 걸린 것처럼 자세하게도 보이는 모든 선이 완벽해 아까보다도 더 힘이 풀린 표정을 짓게 됐으니.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건 저기서 나온 사람이 여자도 아니며,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오히려 너무 잘 알아 눈만 마주쳐도 싫어했던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가운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에 선명한 잇자국을 본 란티엔은 차라리 기절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장 자신의 뒷목을 쳐 기절할 순 없어 그가 선택한 방법은 간단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도망치는 것.
란티엔은 대학을 졸업한 후 심사숙고 끝에 내노라하는 대기업의 문을 두드렸다. 실패할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적성에도 맞지 않는 활자를 파고들면서 그런 안일함에 한시라도 넘어가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기업에 보란 듯이 입사하여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 행복하게 살아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이루기 위한 최선의 결론이었다. 소중했던 건 어머니밖에 없었으니 행복하려면 소중하지 않은 것 중에서 가장 나아 보이는 걸 잡아야 했다.
독종이란 소리를 들으며 친구 하나 없이 취업에 매달렸고 끝의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은 결과 합격은 당연했다. 문제는 대기업에 들어간다면 주변에 난다긴다 하는 놈들 다 있을 걸 알았지만 좋은 집안도 인맥도 없는 자신이 위로 올라가기 위하여 뭐든 가장 잘 해낼 거라는 중요한 목표에 사사건건 큰 방해를 하는 놈이 있다는 점이었다.
누가 봐도 고급으로 보이지만 눈에 띄기 보단 단정함이 더 부각되는 정장. 사실 뭘 걸쳐 입어도 명품으로 보일 큰 키와 벌어진 어깨, 긴 다리가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릴 정도였다. 회장님 아들이라는 소문과 엄청난 자산가 집안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늘 부드럽게 웃으며 그런 거 아니라고, 오히려 평범한 가정에 속한 편이라고 분위기 좋게 넘길 줄 아는 좋은 성격까지. 실제로 그는 부자, 혹은 천재들만 다닌다는 엄청난 고등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그 흔한 유학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으며 대학도 평범하지 않은 점수로 들어가 화제가 되었을 뿐 별다른 특징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자기 잘난 줄만 알고 집안이니 재력이니 들먹이는 녀석들에게 시비가 걸렸으나 나중엔 그런 놈들을 입도 뻥긋 못 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존나 재수 없는 놈이라는 뜻이었다.
일을 잘 할거면 성격이라도 좆같던가, 다 가질 거면 뭐 하나라도 못나게 태어나던가. 란티엔은 조금 거친 동작으로 괜히 책상을 정리하며 펜들을 서랍에 쑤셔 넣었다. 고개를 들면 파티션 너머로 입이 찢어질 듯 웃는 팀장 앞에 선 녀석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뒤만 보여도 분명 맨날 짓던 그 미소를 짓고 있겠지. 처음 봤을 때 어딘가 어긋남을 느꼈던 저놈의 웃는 얼굴은 이제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너 같이 살면 맨날 웃겠다. 안 웃을 일이 있겠어!
부들거리는 주먹이 책상을 탕탕 치는 상상을 실현에 옮기지 않도록 참고 있는 동안 같은 입사 동기였던 허양이 의자를 끌고 옆으로 와 란티엔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화내지마, 너도 되게 잘했어 사람들도 그거 다 아는데... 팀장님만 이청한테 잘 보인다고 괜히 대놓고 저러는 거야 알잖아....."
"씨발 그러니까 왜 저 새끼한테만 잘보이려고 하냐고. 나는 위로 못 가고 쟨 간다 이거야?"
"그런 게 아니라 팀장님은 원래 저런 사람이고...."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괜히 와서 건드리기나 하는 허양을 노려보며 란티엔은 이쪽으로 걸어오는 이청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어차피 근 1년 동안 자신이 이청을 싫어하는 건 본인도 알고 같은 팀원들도 알았으며 사무실 책상도 알고 에어컨도 알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걸 일적으로 가져오지 않으니 다들 웃으며 넘어가는 풍경이 그들이 입사한 후 만들어진 익숙한 모습이었다.
"오늘 프로젝트 완전히 넘어갔으니 무조건 회식입니다! 다들 단단히 준비해요."
내내 죽을상이었던 대리가 부활이라도 한 것 마냥 뺀질하게 웃으며 팀원들을 향해 얘기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리로 가는 동안 굳이 이청 옆을 지나가 한마디 하고 지나가는 꼴이 더 좆같았다. 불이라도 나올 것 같은 시선을 느꼈는지 순간 마주친 이청의 눈이 난감함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 게 뭔가 난 저 놈 때문에 또 실적 올릴 기회를 놓쳤는데.
결국 한숨을 내뱉으며 삐꺽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의자에 기대어 머리를 헝클였다.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야차와 같은 표정을 겨우 갈무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허양의 말도 어느 정도 맞았다. 이 프로젝트에서 쾌거를 이룬 주인공은 두 사람이라고 같은 동료들도 말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란티엔은 오히려 그게 더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보기에도 많은 경쟁 회사와 다퉈 최적의 거래처를 찾아내고 그 일에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분석하며 움직였던 사람은 이청이었다. 그래서 굳이 가장 잘한 사람을 뽑으라면 본인 스스로도 분하지만 녀석의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 없이 오로지 능력으로만 인정받아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올라가려 했던 그의 앞 너무 큰 벽이 이청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이제는 불가능하다. 돈도 없고 가족도 없이 어떻게든 버텨왔던 자존심이 이번 프로젝트로 무너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란티엔은 회식 자리에서도 다른 동료들처럼 후련하게 웃을 수 없었다. 제일 고생했다며 이청과 맞붙혀 놓은 자리도 그렇거니와, 낮에 느낀 끔찍한 패배감에 술맛도 나지 않았다. 이미 술에 취해 굴러다니는 과장과 대리를 쳐다보며 나도 저렇게 뇌 없이 살면 좋겠다는 식의 비아냥만 속으로 중얼 거리던 중 옆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취한 걸 본 적이 없다 매번 우리 택시 태워 보내느라 고생하잖아."
"둘이서 술내기 해봤다거나 그런 적 없어?"
순식간에 모여든 시선에 이청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란티엔은 그런 그를 의외라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른 동료들과는 몇 번 개인적으로 술자리를 가져본 적이 있지만 미쳤다고 저 녀석과 단 둘이서 홀짝거릴 일이 있나. 그래서 생긴 것 마냥 술 몇 잔 마시고 얼굴 붉어져서 집에 간다 하는 샌님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입사한 지 2년도 안 된 신입들을 잔뜩 놀리고 싶은 모양인지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둘이 붙어보라며 난리도 아니었다. 그제야 란티엔은 입을 열어 손사래를 쳤다.
"나 혼자 남으면 누가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치워요?"
귀찮은 듯 패기 넘치는 말에 주변 분위기가 더 뜨거워졌다. 다른 건 다 져도 이 빌어먹을 도련님한테 내가 술에도 질까?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며 웃는 와중에 옆에서 늘 그렇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란티엔 씨는 챙겨드린 적이 없었네요. 오늘은 제가 란티엔 씨도 택시 태워 보내드려 볼까요?"
내기 수락과도 같은 말에 동료들은 더 분주해졌다. 끊임없이 웃고 떠들며 술을 이쪽 테이블로 끌어오는 동안 란티엔은 이청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했다. 그쪽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고개를 살짝 꺾으며 콸콸 채워지고 있는 맥주잔의 손잡이를 잡으며 말을 건넸다.
"난 이청 씨 택시 안 잡아 줄 건데요."
"집에 안 보낸다는 말씀이세요?"
"뭐래? 술집에 버리고 간다는 말이잖아요."
그게 뭐가 그리 웃기는지 이청의 입꼬리가 더욱 호선을 그렸다. 걱정 하나도 안 되는지 여유롭게 웃는 녀석을 두고 이를 갈며 란티엔이 먼저 한잔을 마셨다. 그러면서 옆 눈길로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수 없는 놈. 그가 과장처럼 취해 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걸 꼭 동영상으로 찍어 사내에 다 뿌려야 이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터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술에선 져본 적이 없는 란티엔은 자신이 반드시 이 내기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 첫 잔의 기억 다음이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다들 연신 죽겠다며 굳어진 몸을 스트레칭하거나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커피가 생명수라도 되는 것처럼 퀭한 눈으로 빨대를 물고 있을 때 란티엔은 책상 앞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파티션에 몸을 숨겼다. 대기업이라고 이것도 좋은 거 쓴다며 나름 칭찬했던 기억이 있는 의자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도 허리가 지끈거렸고 엉덩이에 닿는 느낌이 거칠었다. 옷만 입고 뛰쳐나와 회사 직원용 샤워실에서 급히 씻은 상태라 어제의 옷을 그대로 입어 찝찝하기까지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숨어봤자 꽤나 덩치가 큰 그의 몸이 가려지진 않았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고, 숙취보다 괴로운 아침의 광경과 사라진 기억이 천만 배는 더 중요했다.
왜 내가 저 새끼랑 호텔에서, 아니 진짜 잤나? 사실 그냥 둘 다 곯아떨어져서 잠만 잤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허벅지에 남겨진 건 분명 키스마크였고 저놈 목덜미에 있는 건 잇자국이었다. 술에 꼴아 결국 개가 되어서 서로 물고 놀았나?
별 생각을 다하며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슬쩍, 아주 조심스레 이청을 보자 힘들지도 않은지 늘어져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평소와 같이 매우 깔끔한... 오히려 평소보다 더 빛이 나는 듯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살며시 보이는 목덜미에 집중하자 아침에 봤던 자국은 여전했다. 오히려 더 선명하기까지 해 머리가 어질 해지려는 찰나였다.
'일 잘하면 됐지 왜 얼굴도 존나 잘 생기고 지랄이냐 넌...'
'나 잘생겼어?'
씨발!
쾅하는 소리와 함께 란티엔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사무실 밖으로 빠르게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 남자도, 몸을 일으켜 그 뒤를 따라가는 광경은 제법 생소했으나 아픈 머리로 곡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이내 다시 흥미를 잃고 엎어지기 시작했다.
되는 일이 없다. 텅 빈 담뱃갑을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올려 옥상 밑의 점과 같이 보이는 사람들을 응시하는 란티엔의 표정은 피로가 가득했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만 많아질 것 같아 머리를 흔들어 고민을 떨치고 나온 김에 편의점에 들려 담배나 사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이쪽으로 걸어오는 한 인영과 정확하게 마주쳤다. 당연하게도 이청이었다. 자신을 보러 온 게 맞는지 점점 다가오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건 언제나 달고 살던 미소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 성격 더러운 걸 이렇게 보고 싶어 할 줄이야... 보고 나면 책임져야 할 텐데, 란티엔.'
아까와 같이 머릿속에 가득 보이는 가까워진 녀석의 얼굴과 낮은 목소리가 뿔난 그의 기세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란티엔이 무의식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자 그만큼 이청의 발이 가까워졌다. 그 사실에 어딘가 욱한 란티엔의 몸이 멈추고 불어오는 바람 속 이청의 손이 슥 올라왔다. 가지고 있던 큰 쇼핑백을 들고 있는 채였다.
"정장. 속옷부터 신발까지 다 있으니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 여러모로 불편하잖아."
이제 보니 이청의 옷도 어제와 달랐다.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쇼핑백을 채가자 그 속에 든 건 자신의 사이즈와 똑같은 치수의 정장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제 취향에도 맞는 옷에 황송해하기라고 해야 하나 속으로 조소를 터뜨린 란티엔은 그 쇼핑백을 발 옆에 툭 떨어뜨리고 눈앞의 이청과 눈을 마주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아침에 룸서비스로 주문한 건데 그렇게 달려 나갈 줄 몰랐어. 혹시나 싶어 가져온 거고, 어차피 내 치수랑은 다르니 너한테 가는 게 맞지 않나."
아주 논리적인 새끼 납셨네. 결국 터져버린 화에 란티엔은 헛웃음을 지으며 한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역시 머리만 굴리는 건 제 적성이 아니었다.
"좆같은 얘기 그만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다 불어. 토씨 하나 빼지 말고 알겠어?"
이청은 땅에 떨어진 쇼핑백을 한번, 그리고 짓씹듯 말하는 란티엔에게 한번 눈길을 주고는 고개를 옆으로 뉘었다. 둘 다 서로에게 반말로 얘기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을 만큼 란티엔은 분에 잠겨진 상태였다.
"듣다가 옥상 아래로 뛰어내리지 않는다는 약속 하나만 해주면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얘기해줄게."
"씨발 당장 말 안 하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녀석이 입을 열고난 후, 그는 아까의 약속을 취소하고 싶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장이라도 저 밑으로 뛰어내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이었다.
하루 반나절 동안 일어났던 얘기는 꽤나 길어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오랫동안 서 있어야 했다. 물론 이야기를 끊임없이 한 것은 아니었고 란티엔이 두 번 정도 직접적으로 잠깐 입 다물라며 이청의 말을 끊었고 세 번 정도는 거칠게 발을 구르거나 옥상 턱을 차는 행위로 끊겼으며 마지막 이야기까지 마무리 지으려던 곳에서 괴로운 신음과 함께 주저앉은 란티엔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 이청은 그 앞에서 그만두라거나 안 듣겠다고 포기하지 않은 눈앞의 남자를 조용히 혼자서 칭찬하고 있었다.
사건은 간단했다. 술내기를 시작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두 명은 취하지 않았고 그 주변 사람들만 하나씩 쓰러져 갔기에 이청은 먼저 여기까지 하자며 동료들을 보내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제야 취한 티가 나기 시작한 란티엔이 그를 꽉 잡고 놓지 않으며 잔말 말고 앉아있으라 이를 갈았고 어떻게든 주변을 정리한 이청과 란티엔은 둘만 남아 술자리를 계속 가지게 되었다. 그럼 술 먹다가 앙숙끼리 주먹다툼이나 하지 왜 호텔방에서 뒹굴게 되었냐며 기다리지 못하고 역정을 내는 란티엔에게 이청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왜 이렇게 잘 생겼냐고 내 얼굴을 만지면서 놔주지도 않는데 그게 플러팅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나?"
이청도 양심이 있는지라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란티엔을 택시에 태워 보내려고 시도는 했었다. 하지만 아직 안 끝났다며 목에 매달리는 행동은 둘째치고 집에 혼자 있기 싫다며 울먹이는 모습에 결국 죄송하다고 돈을 쥐어주고 다시 그를 택시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가 떠난 이후 란티엔은 누구와도 감정을 나누지 않고 적당히 살아온 게 맞았다. 나도 그건 알지만 그게 하필 왜 저 새끼 앞에서 터지냐고!
아무리 하늘에 물어도 성인 되고 처음으로 술에 취해 필름까지 끊겨 본심을 다 꺼내놓은 수치심은 사라지질 않았다. 굳이 나눴던 말들을 그대로 읊어주는 이청은 빌어먹게 멀쩡해 보였고 어쨌거나 제 탓도 있으나 저놈의 혐의가 명백한 결과에 란티엔은 밤에 휘두르지 못 한 주먹에 힘을 줬다. 이청에게 매달리고 비비적거렸던 기억이 짧게나마 돌아올 때마다 힘의 강도는 더더욱 세지고 있었다. 아픈 허리고 자시고 저 매끈한 얼굴을 치기 위해 팔을 들었고 녀석은 그걸 알면서도 눈만 잠깐 깜빡였을 뿐 맞아주겠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오냐 합법적으로 니 새끼 한번 쳐보자. 몸에 회전을 주려는 순간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들이켜고 어깨를 크게 부풀렸던 란티엔은 본능적으로 곧게 서 있던 이청과 두고 갈 뻔 한 쇼핑백을 낚아채 사람들이 오지 않는 구석으로 숨어 들어가 필사적으로 밖을 살폈다. 사내 폭행 사건 때문인지 낮부터 적나라한 섹스 얘기하고 있어서 이러는 건지 본인도 짐작 가지 않았으나 우선은 숨고 싶었다. 그게 본심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통증에 아파하는 다리에 의해 몸이 뒤로 넘어가려는 순간 자세가 바뀌었다. 벽에 등을 기댄 이청과 그런 녀석에게 뒤로 안겨 입이 막힌 채 란티엔은 우선 눈썹을 사납게 올리면서도 얌전히 기다렸고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중 허벅지에서 은근한 감촉이 닿아 몸을 굳혔다. 허리가 아파 뒤척이는 사이 뭔가 두툼하고, 단단한, 뭔가가....
"개새끼야 섰냐? 이거 미친 새끼 아냐?!""몇 시간 전까지 물고 빨았던 허벅지가 계속 닿아오는데 이건 내 탓이라고만 하긴 좀 그렇다고 생각해."
물고 빨..... 태연하게 말하는 꼴이 얄밉고 짜증 나 팔꿈치를 움직여 뒤를 가격한 란티엔이 소리를 낮춰 위협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니가 이딴 식으로 세우고 다니는 등신새끼인 거 알게 하기 싫으면 떨어져."
"미안하지만 그 사람들 앞에선 그럴 일이 없어서 괜찮아."
"싫어하는 놈이 닿아도 서는 새끼가 말이 많다?"
"누가 누굴 싫어해?"
뻔뻔한 대답에 란티엔은 눈으로 답했다. 내가, 너를. 니가 나를.
"너 나 안 싫어하잖아."
그런 와중에 귓가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어깨가 굳은 그를 자연스럽게 어루만지는 이청의 손이 크고 부드러웠다. 안심하라는 양 어깨를 쓰다듬는 태도가 평소에 보여주던 다정과는 결이 달랐다.
"이번 프로젝트할 때도 뭐 하나 잘 해오면 일단 눈부터 반짝이고 날 보던데."
2초 만에 사나워지긴 하지만. 웃음과 같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뱃속을 간지럽혔다. 흐릿한 기억 속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리던 그 음성이었다. 존재감을 뚜렷하게 묵직한 양감과 가까운 목소리, 그리고 마치 자신의 행동과 눈빛을 다 꿰뚫고 있는 듯 한 말에 결국 참지 못 한 란티엔이 팔을 뿌리치며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이유보다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말에 말까지 떨려왔다.
"존나, 헛소리만 늘어서, 아주, 이 씨발...."
"일 잘하고 잘생기고 재수 없을 만큼 잘나서 화난다며. 아, 너 왜 이렇게 잘하냐고 물어본 건 답해주기가 좀..."
보기 좋은 옷감에 둘러싸인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며 란티엔은 사람이고 뭐고 그 자리를 박차고 다시 뛰쳐나갔다. 이 와중에 이왕 가져온 거 찬물로 샤워나 하고 정신 차리자는 의미로 야무지게 쇼핑백을 든 상태였다.
복도의 사람들이 무슨 일 있나 계속 쳐다본 이유가 있었다. 샤워실에 도착해 거울을 확인하니 톡 건드리면 터지는 토마토도 이 정도 붉지는 않을 얼굴이었다. 얌전한 척 매너 있는 척은 다 하더니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부끄러움도 없는 새끼. 술에 취한 사람을 데리고 허리가 이만큼 아플 때까지 괴롭힌 나쁜 새끼. 그리고, 그리고....
자격지심보다 더 깊은 곳에 숨겨놓은 호감까지 알아챈, 너무 똑똑해서 죽여버리고 싶은 이청.
아무리 벽을 주먹으로 치고 뻐근한 허리를 문질러봐도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자신을 안고 있던 단단한 품과 낮은 목소리, 웃는 낯이 사라지니 더욱 이질감 없이 다가오는 얼굴에 도망가면서도 저건 나만 보여주는 표정이라는 사실에 잠깐이나마 희열을 느낀 본인도 머저리 같았다. 늘 이래도 저래도 넘어가던 이청이 눈을 빛냈던 새벽과 낮이 되어서도 여전히 쏟아지는 시선에 짜릿함마저 느꼈다. 아무래도 등신 새끼는 나였나 보다.
찬물로 샤워를 끝내고 단정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언제나 그렇듯 사무실엔 과장과 대화를 나누는 이청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 얇게 떨어지는 머리카락만 봐도 다시 얼굴에 열이 오를 것 같아 급하게 자리에 앉으려는 그를 과장이 발견했다. 어서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하는 탓에 상사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란티엔이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드디어 날 알아보는 건가 신나서 갔을 텐데, 왜 하필 오늘? 그런 란티엔의 마음은 전혀 모르는 과장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 일도 잘 끝냈으니 둘이라면 이 프로젝트도 잘 이끌어갈 수 있을 거라 믿어 내가! 그래서 보내는 거니까 잘해오고, 응? 여기 이청 씨에게 설명 다 해놨으니까 전해 들어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떠나는 과장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며 옆을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란티엔을 향해 나지막한 말이 떨어졌다.
"출장 잡혔어요 란티엔 씨. 우리 둘만."
반사적으로 돌려진 고개에 예의 그 미소를 띤 이청이 마주 화답했다.
"남자 둘이니 방은 하나로 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괜찮죠?"
충격받은 란티엔을 바라보며 이청은 옥상에서 꺼내지 못 한 마지막 이야기를 언제 건네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해버릴까, 아니면 둘이 출장지로 이동하는 중에 말을 꺼낼까. 그도 아니면 지친 일을 끝내고 숙소에 들어와 술이라도 한잔 놓고 해야 할까... 답지 않은 생각들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오히려 즐거운 기분이었다.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는 노란색 불에서 이젠 선명한 붉은색으로 변한 두 사람의 사이가 정강이와 옆구리는 아프더라도 좋은 신호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색은 그의 목덜미처럼 붉은색. 경고의 의미가 되기도 하고, 간지러운 애정의 색이 되기도 하는 색이었다.
지켜만 보던 노란색에서 완전히 멈춰서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게 되는 붉은색을 넘어 언젠가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초록색이 될 때까지. 이청은 란티엔에게 너보다 내가 더 먼저 반했다고, 면접관들보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너에게 더 집중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게 되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은, 몇 대 맞아야겠지만.